[레크리스-4 / 맥스-2] 210331 -2-
"...아이, 이런 거 필요 없다니깐..."
"혹시 모르잖아요."
"정말 괜찮다고..."
"그래도 일단은 가져가두는 것도 나쁠 건 없을 것 같은걸요. 그렇지 않습니까?"
"...에효, 말을 말자. 아무튼 고맙다."
오늘은 무슨 일인지 바깥에 가볍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비가 내리는 걸 보는 게 얼마만인지... 최근에는 꽤나 화창한 날씨만 계속 이어졌던 것 같다. 분명 화력팀장도 그런 의도로 나에게 챙겨준 것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걸 그렇게 자주 사용한 적도 없고, 오히려 비를 맞고 다니는 걸 좋아했던지라 그저 귀찮은 짐덩어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래도 화력팀장이 챙겨준 건데 눈 앞에서 대놓고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대충 혼자만의 장소나 맥스의 거처에 두고 다녀야겠다. 마침 맥스를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으니, 일단 화력팀장 앞에서 이걸 쓰는 모습을 보여준 뒤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고보니 이게 무엇인지 말을 안 했던 것 같다. 뭐, 말하지 않아도 이미 눈치챘을 수도 있겠지만, 화력팀장이 나에게 건네준 건 우산이었다. 나름대로 나랑 잘 어울리는 걸 챙겨 주겠답시고 검정색과 빨강색이 잘 스며들어있는 적당한 무늬가 새겨진 우산이었다. 누가 봐도 내 취향과 색깔에 걸맞는 우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우산을 자주 쓰는 사람이어야 말이지... 아무튼, 열심히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벌써 거처 근처에 도착했다.
맥스의 거처 근처도 하늘에서 꾸준히 떨어지는 빗방울 때문인지 꽤나 축축하게 젖어있는 부분들이 많이 보였다. 나중에 비가 그치면, 이런 주변들도 꽤 다듬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분명 맥스 혼자서 고생할 것 같으니, 내가 도와줘야지.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연스럽게 맥스의 거처 안으로 들어갔는데, 맥스가 보이지 않는다. 분명 오늘 특별한 일은 없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아무래도 맥스도 비가 내리는 걸 잠시나마 구경하고 즐기려고 바깥 어딘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겠지.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와선 주변을 둘러보곤 왠지 맥스가 있을법한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맥스가 있을법한 장소라기보단, 묘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공허의 기운을 조금씩 느끼며 발걸음을 옮긴다고 하는 게 더 가까울 것이다. 맥스는 나에게 유일하고 강렬한 공허의 헌터이니까. 그래서 주변에서 무언가 그을림이나 기묘한 냄새같은 게 느껴진다면 사실상 맥스가 주변에 있구나, 라고 조용히 혼자서 깨닫기도 했다.
그렇게 공허의 이끌림에 도착한 곳은, 꽤나 으슥하면서도 주변을 넓게 둘러볼 수 있는 공간. 그 곳의 구석에서 자연스럽게 맥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맥스."
가볍게 이름을 부르자, 맥스는 나를 바라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다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레크리스."
똑같이 가볍게 이름을 부르다가, 약간 웃는 목소리와 함께 말을 꺼내는 맥스.
"의외로 우산같은 건 안 쓸 줄 알았는데, 쓰고 있네요."
"나도 좋아서 쓴 건 아니라고. 화력팀장 녀석이 꼭 챙겨가라고 해서 그렇단 말이지."
"그렇구나. 뭐, 딱히 나쁜 의도는 아니었어요. ...그리고, 우산 색깔이랑 너랑 잘 어울리네."
"뭐, 그건 나도 인정한다. 나름대로 나에게 잘 맞춰준 우산같더라고."
생각해보니 지금은 화력팀장이 근처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계속 이걸 쓰고 있을 필요가 있나- 싶어서 우산을 접곤 맥스의 옆에서 느긋하게 비를 맞으며 주변의 풍경을 둘러본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EDZ의 넓은 경치를 구경하고 있으면 꽤나 이 곳의 폐허같은 분위기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쩌면 화력팀장 녀석이 다양한 모험을 좋아하는 것도 이런 다양한 풍경들을 관찰하고 기억 속에 남겨둘 수 있으니 그런걸까, 라며 혼자서 조용히 납득하기도 하며 동시에 그런 기억과 경험들이 나에게 새로운 흥미를 이끌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 방금 전부터 그런 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맥스는 나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어, 왜?"
"뭘 그리 생각하고 있어요? 아직 바쁜 게 남은거야?"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풍경 보니까 갑자기 잡생각들이 막 몰려와서."
"그렇구나. ...여기선 편하게 있어요. 레크리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으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무슨 걱정이라도 끼친 것 같잖냐."
"나 걱정하게 만들면 정말 화낼거야."
"아이구, 알겠어, 알겠다니깐."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맥스를 걱정하게 만들 일이 있을까. 과거의 나였다면 충분히 가능하긴 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화력팀에 소속되어 있으니 혼자가 아니기에 그만큼 신중해야 됨을 깨닫기도 했고, 이렇게 사랑스러운 애인도 있으니 함부로 누군가를 걱정시키게 해선 안 된다는 그런 자연스러운 다짐을 더욱 굳게 다지기도 했다. 조금씩 생기는, 나름대로의 좋은 변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편으론 맥스도 내가 늘 저돌적이고 막무가내라는 과거의 이야기만 늘 하곤 했으니, 그만큼 앞으로 무작정 나설까봐 걱정되어서 해주는 말일지도 모른다. 현재의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고, 과거의 이야기만 많이 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아무튼, 혼자만의 잡설은 적당히 하도록 하고 좋은 분위기 속에서 맥스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만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경치는 볼만해요? 이런 거 보려고 왔을 것 같은데..."
"헤에, 너 보러 온건데. 그래도 경치도 충분히 볼만하네."
"...갑자기 그렇게 훅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기분은, 뭐... 당연히 좋지만..."
"기분 좋으면 그걸로 된 거지. 그러고보니 늘 이런 경치 보러 오는거야?"
"항상, 이라고 해야 될까요? 생각해보면 항상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이런 날엔 좀 괜찮으니까."
"잔뜩 볼 수 있을 때 봐 두라고. 너는 늘 이런 편안한 시간을 가지며 지내진 않을 거 아니냐."
"...당신이 옆에 있어야, 그나마 편안해지죠."
"역시 늘 경계가 많은 헌터라니깐."
"헌터는 다 그렇다구요. 당신이, 조금... 특이해서 그런 거지..."
투덜거리면서도 한편으론 부정하지 않는 듯한 맥스의 모습에 가볍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렇게 가벼운 스킨십을 할 때마다 살짝 맥스는 당황하고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런 모습이 보인다고 내가 물러설 헌터였던가? 맥스도 그런 나의 모습을 알고 있기에 그저 얼굴만 잔뜩 붉힌 채 따로 물러나지 않고 같이 붙어있어 주었다.
"...그래서, 지금은 별로 안 바쁜거죠?"
"다 해결하고 왔지."
"다행이네요. ...나는 괜찮지만, 혹시라도 레크리스가 걱정되니까... 거처로 들어갈래요?"
"나도 상관은 없는데, 뭐- 거처에서 빗소리 들으며 시간 보내는 것도 좋지."
"그럼 가요."
맥스는 나의 손을 가볍게 잡곤 마치 앞장서듯 발걸음을 옮겼다. 늘 맥스가 뒤에서, 아니면 옆에서 같이 걸어주는 것만 보다가 이렇게 앞장서서 걷는 모습을 보니 내 앞에서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구나, 싶은 것이 느껴져서 내심 뿌듯한 마음에 살짝 미소짓기도 했다. 그런 미소를 눈치챘는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는 맥스의 모습은 덤.
"나 보면서 이상한 생각이라도 한 거죠?"
"엥, 아니거든? 그냥 멋있고 귀여워서 그렇지."
"...또, 갑자기... 그렇게 들어오지 말라니깐..."
맥스의 부끄러워 하면서도 앞장서는 모습을 유유히 지켜보며, 같이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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