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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특이한 아이

01. 특이한 아이

어릴 때부터 나는 특이하다는 소리를 줄곧 듣고는 했다.

어렸을 때는 그게 좋은 이야기인 줄 알았다.

특이하다는 게 똑똑하다와 비슷한 뜻의 칭찬인 줄 알았으니까.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공부를 열심히 하여 영재교육원에 다니기도 했었다.

그리고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과학영재학교에 입학 하기를 꿈꾸는 아이였다.

할아버지는 내가 받아온 상장들과 메달들을 스크랩북에 모았었는데 그 두께가 어마어마했던 기억이 난다.

특이하다는 게 똑똑하다는 뜻의 칭찬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머리가 크고 난 뒤였다.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도 머리가 자라지 못해

특이하다는 말을 이성적인 매력이 있다는 또 다른 칭찬인 줄 알았다.

'종잡을 수 없다, 4차원이다, 특이하다'가 남들이 나를 설명하는 단어였다.

누구는 그것을 정말 남들과 다르다는 객관적인 뜻으로 사용했을 수도 있지만

성인이 되어서 바라보기에는 그 말의 뜻은 한국사회에서는 확실히 욕이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소심하고 아주 내성적이었지만

학년별로 올라갈수록 나는 남들과 달라지고 싶어서 주도적으로 나의 컨셉을 하나씩 추가하고는 했다.

어느 날은 반장이 되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만 같아 반장이 되고 싶어서 물질 공세를 하며 난리를 치던 때가 있었고

어느 날은 내가 제발 반장 후보에 오르지 말아 달라고 집에서 기도하며 울기도 했다.

어느 날은 소위 노는 아이들 무리에 끼고 싶어서 싶어서 그들 앞에서 매력을 뽐내려 나대던 날이 있었고

어느 날은 조용한 일본문화를 좋아하는 무리에 끼고 싶어 일본어 대화를 달달 외우던 때가 있었다.

나 자신도 내 정체성을 모르겠고 계속 휙휙 바뀌는 취향에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나조차도 감당하기 버거운 아이라고 생각이 들었었다.

항상 특별함을 추구하기에 나는 내 집 근처의 일반고등학교에 입학하기를 거부하며

다른 지역의 자사고에 도전하여 결국 성공하였고

열일곱 살부터는 집에서 나와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는 너무나도 기숙사 생활이 만족스러웠다.

현실은 영 딴판이었긴 했지만 그래도 외국 영화 속에서만 보던 보딩스쿨과 나름 가까웠기에,,,

이곳에서도 나는 더 특별해지고 싶었다.

공부만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더 특별해지기 위해서는 공부 대신 다른 게 필요했다.

학교를 마치고 자습시간에 나는 학교를 나와 근처 학교의 노는 아이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곤 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알게 된 재밌는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며칠 동안 다른 지역에 놀러 가느라 가출을 하게 되었다.

자사고에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게 나는 오히려 학교 전체에서 왕따가 되었다.

선생님마저도 싫어하는 아이...

생각과 점점 다르게 흘러가는 나의 학교 생활이 당황스러웠다.

나를 무서워할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학교 친구들은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힘든 일과 괴롭힘들이 있었지만 언급하지는 않겠다.

학교 물을 어지럽힌 죄로 선생님마저도 학교폭력에 합세하여 나는 아주 정당하고 합법적으로 폭행을 당하고

선생님한테도 따돌림당하는 엄청난 '학교폭력'을 당하였다.

학교 선생님들 사이에서 겉돌던 체육선생님만이 나에게

'힘내라, 인생은 파도 같은 거다.'라고 말해주는 정도의 위로를 해주었다.

열일곱 살 때 나는 생각했다.

'이번 생은 망한 걸까.'

열여덞 살이 되기 얼마 전날 우리 부모님은 나의 가방을 뒤지다

'말보로 레드' 한 갑이 나오게 되자 길거리에서 내 얼굴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머리채를 잡고 질질 차로 끌고 가 운전을 하여 어느 병원 앞에 버려두고 갔다.

'애가 왜 이렇게 유별나.'라는 소리를 끝으로,,, 나는 부모에게도 버려졌다.

부모님은 그때 나를 포기하기로 하셨다.

시골에 있는 폐쇄병동은 흡사 가족들에게 버려진 사람들의 교도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돌보기 귀찮고 억센 노인네들은 그들의 자식들에게 버려져 이곳에 왔고...

개중에 젊은 편에 속하는 중년들은 그들의 반려자들에게 버려져 이곳에 온 거겠지...

나 같은 어린 나이의 사람은 딱 세명이 있었는데

한 명은 계속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서른 살 언니였고

한 명은 이십 대 중반의 언니였는데 지금 생각하기로는 자폐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 셋은 모두 부모에게 버림받아 이곳에 와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면회시간 때에는 면회를 나가곤 했는데 나는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물론 가족들이 먼저 면회를 온다고 해도 나는 받아줄 생각이 없었지만

실제로 가족들이 왔다면 나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빌면서 이곳에서 빼내 달라고 요구했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나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어느 날부터 문득 외롭고 이곳에 있으면 정말 내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서

매일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하고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 사과를 했지만

첫 통화 이후로는 아무도 내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이렇게 가족에게도 완벽히 버려진 사람들은 병원 직원들이 가장 먼저 알아채는데

(환자들이 전화하는 곳이 직원들이 있는 곳 바로 앞에서 해야 한다. 면회도 그들 앞에서 이뤄지니깐)

그런 사람들은 병원 직원들이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는 인물로 찍히게 된다.

나는 치매환자도 아닌데 나에 대한 안 좋은 말을 내 면전에서 하기 시작했다.

'쟤 부모 또 전화 안 받는다.' '전화는 왜 계속 거는 거야, 어차피 안 받잖아.' '전화해서 또 불쌍한척한다.'

이러한 말들을 내가 전화를 걸기 위해 찾아갈 때마다 내 앞에서 자기들끼리 웃으며 말했다.

가족들에게까지 버려진 환자는 이곳에서는 완벽히 최약체가 된다.

어쩌다 내가 이런 인생이 되었을까,,

그때의 나는 나에 대한 반성보다는 정신적으로 아무 문제없는 나를

담배랑 술좀 마셨다고 폐쇄병동에 입원시키는데 허가한 의사 그놈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신병원에서 탈출하여 나의 이야기를 신문사나 방송사에 얘기하면

엄청난 특종이 되고 이 병원이 바로 망해버릴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험하게 다루는 남자 보호사,

정체도 모를 주사를 시도 때도 없이 놓는 간호사 역시 직업을 바로 잃게 될 거라 상상했다.

폐쇄병동에 입원한 지 꽤 시간이 지나서 처음 의사를 보는 날이 있었다.

그에게 나는 이곳에서 나가게 되면 이 정신병원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리겠다는

나의 속마음을 내비친적이 있었다.

내가 폐쇄병동에 온 첫날 날 본 적이 있냐고,

의사한테 진단도 받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입원을 하고 있는 거냐고.

그랬더니 의사가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한마디를 했다.

'첫날에 저를 봤잖아요, 기억이 안 나나 보군요.'

아... 그렇다.

이미 나는 폐쇄병 동안에 있는 사람이므로 그냥 남들 눈에는 정신병자인 거다.

첫날에 분명 의사를 봤는데 내가 기억 못 하는 거라고만 말하면 남들은 내가 아닌 저 의사의 말을 믿을 거다.

내가 치매환자도 아니고 불과 며칠 전일을 기억 못 할 리가 없지 않은가.

특히나 폐쇄병동에서의 첫날은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그날 나를 진료 봤다고 말하다니.

그날 얼마나 악다구니를 썼는데 그게 그날 가능했을 일이라 생각하는 건가.

나 같이 억울하게 갇히고 버려진 사람이 수없이 많았겠지.

그런데도 이 병원은 지금도 잘도 굴러가는구나.

애초에 여긴 그런 목적의 병원이겠구나, 이런 병원을 우리 부모는 잘도 알아냈네.

승산이 없는 게임이구나...

입원한 지 처음으로 의사를 마주하고 나의 무력함을 깨 닳은 날.

나는 실핀을 시멘트에 갈고 갈아 뾰족하게 만든 뒤

아무렇게나 내 팔목을 파고 파고 또 후벼 팠다.

'죽어.. 죽어.. 그냥 죽어줘.'

뭐 대충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자해를 했다.

나는 내 몸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내 몸뚱이에 무슨 흉터가 남든 상관이 없었다.

폐쇄병동에 있으면서 내 정신이 점점 진짜 이상해져 간다고 생각했다.

옆에서 할머니가 아무 곳에서나 똥을 싸고

자폐증 언니는 아침마다 내 잠을 깨우러 왔다가 나와 몸싸움을 하고

산책시간에 내가 담배를 피우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이 지긋지긋한 병원에서 죽어서라도 떠나고 싶었다.

프로 자살러라는 언니한테만 정을 붙이며 정신을 붙잡고 살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이 행위가 자살 시도라 생각했으나 사실상 자해였지만

이렇게라도 한다면 엄마 아빠가 날 구해주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바로 독방에 갇히게 되었고 소독을 하러 온 보호사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된다.

'자살하려면 이걸로 안된다. 이건 장난인 수준이다.

동맥을 끊어야 하는데 더 깊게 찔러야 한다.

사선을 아니라 가로로 그어야 한단다.'

라고 조언을 해주고 나갔다.

내 자해 소식을 분명히 들었을 텐데 부모님은 끝내 오지 않았다.

나는 방학이 끝날 무렵 나오게 되었고,

(원래부터 내 입원기간은 방학기간으로 맞춰져 있었던 것 같다.)

폐쇄병동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다시 학교로 보내지게 되었다.

학교에 간 첫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는 게 너무 낯설게 느껴지고

숨을 쉴 수가 없었고 머리가 일시 정지되는 느낌이 들었다.

공부를 하려고 책을 펴도 글이 읽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내가 폐쇄병동에 강제 입원을 당했기 때문에

내 정신이 이상해지게 된 거라 생각한다.

부모에게 말해도 자퇴를 하기 위한 거짓 연기라 생각했는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또 한 번 가출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다른 지역으로 가지는 않았고 그냥 혼자서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잠을 지새우고 다음날 집에 들어갔다.

가출을 하고 돌아오니 이제는 부모도 나를 포기했나 보다.

그들은 나에게 화도 내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었다.

자퇴서를 쓰러 가는 길에도 아무 말하지 않고 나와 함께 가주었다.

자퇴서를 쓰고 오는 길에 아빠와 나는 어느 순대국밥집에 들어가

같이 순댓국을 먹었다. 엄청난 긴장감에 나는 그 순대국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고

집에 돌아와 조용히 속을 게워내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는 그 과정은 힘들었지만

다음날부터 나는 족쇄 같은 이 세상에서 드디어 해방이 되었다고 느꼈다.

그리고 나는 지옥 같은 학교생활보다는 편안한 집에서의 생활이 더 나을 거라 안심했었다.

나는 열여덟 살 일 년 동안 밖에도 나가지 않고

가족들과도 대화하지 않은 채

하루 종일 컴퓨터만 하는 히키코모리가 되었다.

인터넷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하루 종일 이야기하는 게 내 일과였다.

나와 대화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나만큼 삶이 힘들고 피곤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과 얘기를 나누면 조금 힘이 났다.

나보다 나이 많은 서울예대 학생도 있었고 그는 항상 나보고 안산에 놀러 오면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했다.

안양에 사는 나와 같은 나이의 외고 학생도 있었다. 이 친구와는 대학생 때까지 연락을 주고받고는 했다.

그 학생도 왕따를 당해서 다른 외고로 전학을 갔는데

결국은 좋은 대학교에 입학해 성공적인 대학생 생활을 하며 잘 지냈다.

나는 어느 날 더 이상은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혼자 큰 도시로 가서 대학생들이 사는 하숙집에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서울로 가겠다고 했지만 이모가 있는 부산으로 가는 게 어떠냐는 말에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혼자서 아무 짐도 없이 덩그러니 하숙방에 남게 되었는데 정체모를 자신감이 스멀스멀 나왔다.

뭔가 내 인생을 다시 제대로 되돌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이 45만 원의 하숙비와 검정고시학원비용을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시고 내주셨던 게 고맙다.

하숙집은 모 대학교 근처의 골목에 있는 주택 집으로 2층은 남학생들이 1층은 여학생들이 살았는데

사실상 여자는 나와 어떤 언니 한 명뿐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외로워서 그 언니와 친해지고 싶었는데 수준이 맞지 않는 나와는 상대해주지 않았다. (나 같아도 그랬을 거 같다.)

아침과 저녁은 할머니께서 직접 밥을 해주셨기에 끼니는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지하철 한 칸 거리의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는데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지하철 한 칸 정도는 걸어서 가도 충분한 거리였다.

지하철이라는 것을 처음 타는지라 승차권을 구매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뭔가 돈을 벌어야 된다는 생각에 하숙집 근처 식당을 돌아다니며

알바를 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키도 작고 빼빼 마른 어린 여자아이가

혼자 어린 나이에 부산에 살면서 검정고시를 준비한다고 말하니

다들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

미성년자는 알바일을 할 수 없다고 부드러운 말로 거절하였다.

그래서 단기 알바일을 주말마다 하였다.

3만 원에서 5만 원 정도 벌었는데 하는 일은 선물세트를 조립하는 일이었다.

대부분 아줌마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친절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텃세를 부리셨다.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육체적으로 엄청 힘든 일이었다.

하루 단기 알바를 다녀오면 일주일 동안은 골골 앓았던 거 같다.

그렇게 검정고시를 치는 날에는

학교 앞으로 엄마와 이모가 와서 응원을 해주었다.

고졸 검정고시 시험은 식은 죽 먹기였다.

학교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외국물을 먹은 티가 잔뜩 나는 내 또래들도 있고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있었다.

나와 비슷한 상황인 아이들도 조금은 있었다.

검정고시 시험을 치를 때 나는 또 한 번 깨닫게 되었다.

확실히 내가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이 검고생의 신분이 끝나고 나면 나는 평범하게 살기를 희망했다.

난 대학에 들어갈 것이고 나의 이 모든 것을 숨기고

다시 또래들과 평범한 대학생활을 하며 남들과 평범하게 살게 될 것이라고...

검정고시를 치르고 검정고시 전형의 대학 수시를 준비하기 전에

나는 내 이름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예전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빠가 지어줬다던 그 이쁜 이름으로...

나는 후회나 망설임 없이 바로 내 이름을 바꿨다.

바꾼 이름으로 내 새로운 싸이월드를 만들었다.

이제 대학교에 들어가게 된다면 나는 새롭게 살 거야.

다시는 남들과 다르게 살지 않을 거야.

그 당시 나는 '평범함'이라는 갈증에 목이 메말라있는 상태였다.

그걸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내 이름, 얼굴, 성격 모든 것을 바꿀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제는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새롭게 사는 거야.'

희망이라는 게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인생이 스무 살부터는 불행 끝 행복 시작일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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