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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혁명의 밤하늘, 길을 묻다

[2014] 혁명의 밤하늘, 길을 묻다

[2014.11.06]

<혁명의 밤하늘, 길을 묻다>

- 에드먼드 버크와 토마스 페인이 답하는 보수와 진보의 길 -

- 목 차 - I. 머리말 II. 프랑스대혁명 해석의 비교 III. 개인 생체험과 혁명의 내재화 IV. 혁명과 이데올로기 V. 맺음말

I. 머리말

2014년 갑오년 대한민국은 좌표놀이에 심취해 있다. 못다 핀 꽃들이 잠긴 물에서, 열장 깊이 꺼져버린 땅에서, 그리고 총부리 겨눠진 철망 위 하늘에서까지 대한민국의 좌표는 좌우로 쉴 새 없이 요동친다. 이 모양새가 흡사 어릴 적 동네 놀이터에 삼삼오오 모여 내 땅, 네 땅 나누어 다투던 '땅따먹기'를 연상케 한다. 땅따먹기는 할 때는 손과 눈의 모든 신경을 집중하게 되는 재미가 있지만, 뒷맛이 개운한 놀이는 아니다. 내 구슬을 이쪽, 저쪽으로 보내 선을 긋고, 네 땅 빼앗아 내 땅 넓혀가다 보면 어느새 십년지기 친구와의 우정도, 한 방을 쓰는 형제의 우애도 선 따라 금이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땅따먹기 놀이에도 지켜야 할 상식의 선은 있다. 서로 정해진 기준선 밖으로 구슬을 보내면, 그때껏 그은 선도, 얻은 땅도 다 무효가 된다. 이 규칙 덕에 십년지기끼리, 피 나눈 형제끼리 멱살 잡는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14년 대한민국의 땅과 바다와 하늘에서 이뤄지는 좌표놀이는 아이들 '땅따먹기'에도 있는 이 기준선이 보이질 않는다.[1]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최선을 다해 보장한다는 상식, 국민은 국가의 잘못을 말할 수 있다는 상식, 나아가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비상식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심취해 있는 좌표놀이의 기원은 근대의 포문을 연 프랑스대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테니스코트 선언 이후 구성된 제헌의회에서 입헌군주제 지지 세력이 의회의 오른쪽을 점유하고,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던 공화제 지지 세력이 의회의 왼쪽을 점유하던 혁명 구도는 상징적 의미로서 좌우의 개념, 즉 진보와 보수를 출산했다. 이후의 세계사는 이 '진보와 보수'의 패러다임과 함께 전개되어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프랑스대혁명은 그 자체로 인류사의 '혁명적' 분기점이 됐다. 19세기의 진보와 보수는 프랑스대혁명의 유산을 두고 무산계급과 유산계급간의 대립구도로 의미가 확장되었고, 20세기에는 냉전체제를 관통하는 프레임으로서 전자는 사회주의 세력을, 후자는 자유주의 세력을 뜻하게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진보와 보수는 이러한 프랑스대혁명 이후의 전반적 흐름에 편승하면서도, 압축된 근대화와 남북분단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토양 위에 서 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보수는 "보수해야할 전통제도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하는 대신 기존 체제에 대한 위협을 상정하는 방식으로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고,"[2] 진보는 사회 변혁보다 기득권 쟁취에 더 주안을 두는, 실상 논리 없는 짝퉁 '보수', 실천 없는 짝퉁 '진보'로 전락했다. 원칙과 상식 없이 요란하기만 한 갑오년 좌표놀이는 이러한 대한민국 진보와 보수의 현 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전시품인 것이다.

본 글은 프랑스대혁명으로 잠시 기억의 발걸음을 옮겨, 혁명과 태동을 함께한 진보와 보수의 원류를 찾아가고자 한다. 특별히, 혁명기 양 극점에 서서 혁명을 조망하고 평가한 에드먼드 버크(이하, 버크)와 토마스 페인(이하, 페인)을 비교해 다루고자 한다. 그들은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곳에 거대어장이 형성되듯, 진보와 보수라는 두 물줄기가 혁명이라는 폭발적인 접점에서 만나 근대적 정신을 배태하게 한 장본인이다. 그들에 대한 비교는 혁명이 열어젖힌 근대의 지평을 이해하는데, 나아가 진보와 보수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시금석이 되리라 여겨진다. 더해서 작금의 한국 사회가 프랑스대혁명 이후 역사의 전개 과정을 통해 확립된 '상식'의 의미를 되새겨 줄 것으로 기대된다. 다음 장에서는 에드먼드 버크와 토마스 페인의 프랑스대혁명에 대한 해석을 살펴본다. 3장에서는 버크와 페인의 생체험이 각자의 관점 형성에 미친 영향과, 혁명이 세월을 초월해 오늘의 '나'에게 내재화되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4장에서는 버크와 페인이 각각 근대 보수와 진보의 형성과 발달에 미친 영향에 주목하며 오늘의 대한민국의 진보와 보수가 나아가야할 방향과, 진보와 보수의 구분 이전에 지켜져야 할 상식에 대해서 검토한다. 위의 내용을 토대로 5장, 맺음말에서는 혁명에 대한 나의 생각을 종합한다. 이 글이 혁명의 밤하늘 속 나의 길을 찾는 의미 있는 여정이 되길 희망해 본다.

II. 프랑스대혁명 해석의 비교

1) 국가·사회

버크와 페인의 프랑스대혁명 해석은 크게 세 주제에 걸쳐 비교될 수 있다. 첫 째, 국가·사회에 대한 해석이다. 버크는 "국가는 역사와 전통의 담지자이며 규범과 종교의 수호자"[3]라며 당시 국가 체제였던 군주정을 옹호했다. 더해서 그는 국가를 "인간의 본성을 완성하기 위해 신이 마련한 수단"[4]으로 여겼고, 국가란 전통적 가치를 통해 인민들에게 평화와 안전을 제공하는 신성한 상위의 존재인 반면, 인민은 국가의 지도에 따르는 하위의 존재로 구분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하위 존재인 인민이 들고 일어선 프랑스대혁명은 군주로 표상되는 상위 존재인 국가를 배격하는, 즉 전통적 가치를 무너뜨리고 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폭거였다. 그리고 혁명을 통해 수립된 국민의회는 "무분별하고 방자해진 권력의 전시물"[5]로서 '폐허'를 낳을 뿐이었다. 그는 "재능 있는 자들이 사악한 야망과 저속한 열광을 향한 열망에 따라 활동하는" 상황 속에서 "지도자는 그 추종자들의 무지에 머리를 숙여야 하며, 추종자들은 지도자의 최악의 기획에 굴종해야 한다"며 국민의회가 지향한 공화제를 비판했다.[6]"

버크가 바람직한 사회상으로 여긴 것은 신분제사회였다. 그는 신분제사회 내 불평등에 따른 대립을 "자연세계와 정치세계에서 불화하는 세력들의 상호 투쟁에서 우주의 조화를 이끌어내는 것"[7]이라고 여겼다. 풀어 설명하면, 신분제사회라는 골격 아래 지도자는 존경과 두려움을 받고, 추종자는 심판자로서 자격을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심판자의 자격조건도 혈통, 자산, 덕성에 따라 나뉜다. 하지만 그는 사회 내 권리의 차등적 점유를 "숙고를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며 모든 변화를 타협할 주제로 만들어 자연스럽게 온건함"을 생성시키며, 나아가 "절제를 낳아 가혹하고 조잡하며 부적절한 개혁이 지니는 심한 폐해"를 방지하는 "모든 성급한 결정에 유익한 억제 작용을 하는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여겼다.[8] 주지해야할 점은 이와 같은 그의 견해가 특권 계급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기보다, 소수 혹은 다수가 행사하는 자의적 권력의 폐해를 방지하고자 한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구성원과 이해관계의 다양성을 통해 사회 전체의 자유는 여러 계층에서 표명되는 개별 견해가 존재하는 만큼 많은 보장"을 갖게 된다고 생각했는데,[9] 권력을 3신분에게로 '과도하게' 전환한 프랑스대혁명은 권력의 균형이 적절하게 이루어진 '건전한' 사회의 경로를 벗어나, "미천한 지위에서 빠져나온 이들이 준비되지 않은 위대함에 도취될 가능성"을 증폭시킨 혼돈의 장이었다.[10]

한편 페인은 버크와 정반대의 주장을 전개한다. 페인은 프랑스대혁명 이전의 세습군주 체제를 군주라는 도적이 군림하는 낡은 체제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 낡은 체제의 국가란 "세력 확장을 위해 (인민으로부터) 권력을 찬탈한 것"에 불과하다.[11] 군주를 위시한 특정 계급(귀족)이 인민에게 부여된 권력을 약탈하고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체제가 그나마 유지되기 위해서는 '솔로몬'과 같은 현명한 군주가 지속적으로 나와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데, 세습제의 특성상 오히려 '폭군', '백치', '정신병자'가 나올 가능성이 더 크다. 그래서 페인은 "세습제 양식의 무지와 불안, 그리고 단순한 민주주의의 불편을 한꺼번에 제거한" 새로운 체제, 즉 "사회의 공동이익을 위해 권력을 위임한" 대의제 공화국을 더 나은 대안으로 여겼다.[12] 그는 대의제 공화국을 "모든 국가형태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쉽고, 실제로 운영하기에도 가장 적합한" 체제로 인식했고, 따라서 대의제 공화국이라는 대의 앞에 결집하고 일어선 프랑스대혁명이야말로 민중의 붉은 깃발을 "끝없는 전쟁과 강탈의 체제"의 권좌에 앉아 '숨만 쉬는 자동인형'의 손으로부터 건져낼 역사적 사건이라 확신하였다.[13]

이어서 페인은 "보호되고 만족하며 근면하고 복종적인 인민들"을 두게 되었을 때 "인류의 진정한 도덕적 평등이 존재한다"는 버크의 사회이론이 인간의 자연적 본질에 대한 몰지각한 이해에 기초한다고 비판하며,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는 모두가 공평하게 자신의 몫을 다하고 누리는 사회임을 역설한다. 나아가 그는 인간의 상호의존과 상호이해 관계 속 통합의 연쇄작용으로 말미암아 "지주, 농민, 제조업자, 상인, 무역업자,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직업인들이 서로 남의, 그리고 전체의 도움으로 번영하게" 되는 사회를 대안으로 제시한다.[14] 그는 이러한 사회의 문명적 완전성이 확보되면 확보될수록 국가의 역할도 축소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국가란 사회의 원리에 입각하여 행동하는 인민의 결합에 불과하다"고 표현하기까지 한다.[15] 물론 그는 사회와 인권의 원리에 입각하여 국가를 세우는 것만으로도 기존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가 추구했던 이상사회는 인간의 인위적인 구성물로서의 국가의 제약을 넘어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로 발휘된 진정한 문명사회였다. 프랑스대혁명은 진정한 문명사회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었다.

2) 역사

다음으로 버크와 페인의 프랑스대혁명의 역사 인식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버크는 역사의 진보는 점진적 개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풀어 설명하면 신이 인간에게 지혜를 주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진보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은 또한 불완전하기에, 역사의 진보는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16] 불확실에 대한 미래에 대한 어리석은 열망은 국가의 운명을 요동치게 하는 통제되지 않는 변수이기 때문에, 전통적 지혜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역사 인식의 정수였고, 여기서 전통적 지혜라 함은 "개인의 이성이 아니라, 역사와 전통을 통해서 오랫동안 축적된 집단적 지혜(편견)"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역사 인식에 기초해 볼 때, 프랑스대혁명은 역사의 후퇴 내지 일탈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어리석음, 죄악, 광기에 사로잡힌 프랑스대혁명이 "모든 해악 중 최대의 것"인 "미덕이 없는 자유"를 조장하고 있다고 보았다.[17] 또한, 혁명 없이도 동일한 역사의 진보가 성취될 수 있기에 혁명은 불필요한 희생만을 낳는다고 여겼다.

그가 프랑스 탈주귀족의 왜곡된 혁명 이야기를 실제로 믿었는지, 아니면 혁명에 대한 환멸을 조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억을 조성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혁명의 부정적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혁명을 폭력과 결부 짓는다. 그는 "혁명이란 문명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며 사회를 혼란과 무정부상태로 몰아넣는 '역사의 정상궤도에서의 이탈'이라고 주장하며"[18]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프랑스 왕과 왕비의 수난', '10월 6일의 잔악한 광경'과 같이 함의하는 바가 뚜렷한 선동적 용어를 사용했다. 나아가 그는 혁명 세력을 "사악한 원리의 힘이 그렇듯이, 전복하고 파괴하는 힘"을 부여받은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프랑스 민중이 그들의 "폭압 아래서 틀림없이 신음하고 있을 것이다"고 단언했다.[19] 하지만 실제로 혁명 초기의 프랑스가 "유혈이 낭자하고 학살로 더럽혀지고 절단된 신체와 시체가 나뒹구는 상태"와 같았는지는 의문이다. 여하튼, 버크가 퍼뜨린 기괴한 형태의 혁명 괴담이 유럽을 맴돌며 반혁명을 조장했음은 분명하다.

한편 페인은 인간의 합리적 이성은 미래 사회의 불확실성을 온전하게 극복할 수 있는,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라고 간주했다.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 미래 사회를 온전하게 규정하고 설계하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혼란과 불안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버크의 비판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는 '신중함'이란 덕목이 사라진 프랑스에 "기사도의 시대는 갔다. (이제) 유럽의 영광은 영원히 소실되었다"[20] 는 버크의 견해에 "모든 나라의 군주제와 귀족제라는 희극은 중세 기사제의 그것을 따르고 있고, 버크 씨는 그 장례식을 위한 옷을 걸치고 있다"[21]고 답한다. 또한, 페인은 "모든 나라의 빈민은 당연히 그들의 이익과 행복이 포함된 모든 개혁을 좋아하고 감사한다. 그들이 폭동을 일으키게 되는 것은 그 개혁이 무시되거나 거절되는 경우뿐이다"며 혁명의 당위성을 설명했다.[22] 나아가 그는 혁명의 주된 목적은 이성을 통해 자유와 대의제의 가치를 역사 속에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현대는 앞으로 이성의 시대라 불릴 만하고, 현 세대는 장차 새로운 세계의 아담으로 간주되리라. 유럽의 모든 국가가 대의제로 수립될 때 여러 나라는 서로 친밀해지고, 궁정의 음모와 술책에 의해 조성되는 적의와 편견이 없어지리라."[23]

3) 인간

버크와 페인은 인간과 인간의 권리에 대한 인식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버크는 "인간의 본성은 복잡하고, 사회의 목적은 지극히 복합적이다"다고 말하며 인간 이성의 연약함을 주장했다.[24] 따라서 그는 "사회는 혜택을 얻기 위한 제도"라 전제하고 "인간의 이익을 위해 형성된 것이라면, 그 형성 목적인 이익 전체가 인간의 권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정부는 자연권에 기반 하여 형성된 것이 아니다. 자연권은 정부와 완전히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고, 또 실제 그렇게 존재한다. 자연권의 추상적 완벽성은 그 실제적 결점이다. 모든 것에 대해 권리를 가짐으로써, 모든 것에서 결핍 상태가 된다"고 주장한다.[25] 따라서 급진적인 제도·체제의 변화는 사람의 각성을 일으키지 못하기에 종교, 자연, 교육, 생활 습관을 통해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고 여겼다. 더해서 그는 "덕성과 지혜가 민중이 선택하는 대상이 될 수는 있더라도" 민중의 선택이, 사람들에게 그러한 미덕을 부여할 수는 없다고 여겼다. "민중이 그러한 능력을 갖도록 자연이 약속한 바도 없고 계시 약속도 없다"[26]고 믿으며, 전통, 역사, 편견에 기초한 경험적 사유를 중시한 버크에게 완전한 인간이란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는 신기루에 불과했다.

반면 페인은 "자연권은 인간이 존재하는 데 따르는 권리"라며 버크의 견해를 전면 반박한다. 페인이 생각한 자연권의 범주는 "모든 지적 권리와 정신적 권리, 그리고 타인의 자연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개인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다.[27] 또한, 그는 시민권에는 안전과 보호에 대한 모든 권리가 포함돼 있으며 모든 시민권은 자연권에서 나온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정부가 국민 위에 권리를 갖는 것이 아닌, 국민이 정부 위에 권리를 갖고 있다고 여겼다. 또한 단일성과 평등성의 원리 아래 모든 인간은 신적인 근거로 보든, 역사적 근거로 보든 동일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대혁명은 세습군주정이 "각자의 주권을 갖는 개인들이 상호간 계약을 체결할 때에" 권리의 효력이 발생하는 국가 존재의 근거를 무시하고 국민의 권리를 억압한 데에 대한 정당한 봉기이자, 권리를 되찾는 싸움이라 판단했다.[28]

III. 개인 생체험과 혁명의 내재화

'전쟁이 없고 평화만 있는 세상', '시기, 미움, 질투도 없는 세상.' 이처럼 "꿈이 없는데서 꿈을 보는"데에 혁명의 낭만성이 있다면, 사막에 강이 흘러 푸른 초장으로 변하는 꿈을 꾸는 데에도 혁명의 낭만성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혁명은 '밤하늘의 북극성'을 따르는 것일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피의 언덕'을 오르는 것일 테고, 또 누군가에게는 '보이지 않은 길'을 걷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 혁명은 그 자체가 개개인의 경험과 기억에 동화되고, 나아가 삶의 깊숙한 곳으로 내재화된다. '무엇이 성공한 혁명이며, 무엇이 실패한 혁명인가?'의 질문은 혁명이 어떠한 정치·사회체제적 변혁을 이루었나 보다 혁명이 얼마나 '나'의 삶의 문턱에 가까이 다가섰는지 고민해봄으로써 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관점에서 버크라는 개인, 페인이라는 개인으로서 두 인물이 내재화시킨 프랑스대혁명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회오리치고 용솟음치는 현장을 돌이켜보고자 한다.

버크와 페인은 미국 독립혁명의 동지였다. 페인은 《상식》을 통해 세습군주정을 비판하고, 조지3세의 폭정으로부터 벗어나, 미국독립혁명을 이룸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자고 외쳤다. 존 애덤스는 독립혁명에 페인이 끼친 공로를 치하하며 "페인의 펜이 없었더라면 조지 워싱턴의 칼은 쓸모없었을 것"[29]이라며 찬사를 보낸다. 한편 버크 또한 조지3세의 악정과 의회의 무책임한 정치를 비판하면서 아메리카 식민지의 편에 섰다. 버크는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과세정책에 반대하면서 "식민지를 지배하는 영국의 권리와 법적인 권한보다 현지인과의 타협을 통해 보편적인 원리에 입각한 정책을 실현하는 것이 오히려 이익이 되며 정의로운 것"이라고 말했다.[30] 나아가 그는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아메리카 식민지인이 아니라 '영국 정부'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영국 정부가 '대표 없이는 과세도 없다'는 전통에 근거한 정당한 인민의 권리를 배반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그들이 왜 프랑스대혁명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갈린 길을 걷게 되었을까?

그 답은 그들의 생애 경험으로부터 유추해볼 수 있다. 페인은 빈민의 아들로 태어나 기초교육만을 받고 빈곤과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그는 코르셋 제조공, 간접세 세무서 관리, 담배업자, 교사 등 다양한 일을 했으나 실패를 맛보았다. 열병으로 인해 죽을 위기에도 놓였었다. 하지만 그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고, 상식이 무너진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정의와 인간애'의 상식이 꽃피울 더 나은 내일을 꿈꾸었다. 그 첫 무대가 미국혁명이었다. 그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소개장을 가지고 1774년 미국으로 이주했고, 정치평론가로 새로이 출발했다. 그는 다음 해, 노예제도를 불의하고 비인간적인 것으로 비평한 《아프리카인 노예제도》라는 처녀작을 출판한 데 이어, '인권'은 상식임을 상기시켜준 《상식》을 출판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미국 독립혁명을 통해 서구 전역에 그의 이름이 널리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31] 언제나 사회 기득권 세력의 반대에 서서, 더 많은 인민의 권리를 외친 그에게 시기, 질투와 모함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인권을 유린하는 자는 누구나 나의 적'임을 천명하고 혁명의 밤하늘에 뜬 북극성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실로 그의 생애와 사상은 '상식'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내일을 꿈꾸는 혁명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다. 만약 그가 상식이 바로 선 사회에 살았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고집 센 '보수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반면 버크는 당시 엘리트 중에 엘리트였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유층 자제들만 누릴 수 있는 엘리트교육을 받고 대학에 진학해 고전과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법조인으로서 경력을 시작해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일약 떠오르는 '스타 지식인'이 되었다. 그 후, 정치계에 입문한 그는 당시 정치가의 이권개입에 의해 관행적으로 발생한 부패를 경멸하였고, 단순한 법조문의 해석과 지배자의 권리의 주장, 정치적 관직과 명성을 추구하는 정치를 비판하였다. 그는 보편적 원리에 의해 판단하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국가의 이익과 정의를 실현하는 정치철학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배워온 이론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독립혁명의 자유주의자는 프랑스대혁명에 이르러 보수주의자로 전향했다. 그는 여전히 억압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편이었지만, 자신이 덕성과 재능을 갖춘 엘리트이기에 '무지'한 그들을 도울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사회 개혁은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엘리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배우지 못한' 교양 없는 인민의 지배는 다수의 폭정, 즉 중우정치를 낳을 뿐이라고 여겼기에 민주주의에 반대했고, 정부의 복지 정책은 인민이 스스로 빈곤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위축시키고, 또한 복지를 위한 조세 부담은 모든 사람을 가난하게 만든다고 여겨 자코뱅주의를 반대했다. 계단 위의 삶을 살았던 버크에게 상식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었기에, 계단 아래의 삶을 살았던 페인과는 근원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IV. 혁명과 이데올로기

모든 혁명은 낭만적이다. 따라서 혁명이 낳은 이데올로기도 낭만적어야 한다. 혁명가의 숙명은 꿈이 없는 데서 꿈을 보는 것이다. 혁명이 남긴 이데올로기의 갈림길에 서 있는 오늘 우리의 숙명 또한 아직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에서 꿈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완전해질 수 없다. 완전한 혁명은 없었다. 완전한 이데올로기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인간으로서의 의식과 감수성 그리고, 삶을 두텁게 만들고 싶다고 느끼도록 고무한다." 오늘의 우리 또한 이데올로기라는 건반을 통해 가장 인간다운 전율을 지닌 아름다운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운 선율을 노래해야 한다. 절대군주의 태양이 저물고, 혁명의 노을로 물든 저녁하늘을 버크와 페인은 동일하게 목도했다. 하지만 전자는 곧 들이닥칠 칠흑 같은 어둠을, 후자는 찬란히 빛나는 밤하늘의 북극성을 떠올렸다. 나아가, 전자는 시계의 추를 되돌려 어제의 태양 아래 다시금 서길 원했고, 후자는 내일의 태양 아래 서길 원했다. 비록 결국에 떠오르는 건 내일의 태양이겠지만, 해를 그리워해 해의 빛을 머금은 달과 해를 기다리며 해의 빛을 예견하는 북극성 모두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음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의 우리는 지난 반 백년간 이데올로기의 불협화음을 연주하는데 전문가였다. 여태껏 이데올로기는 "실천의 무기임을 천명하지만 기실 해석의 무기로서 혁명 이후 체제의 정당화의 주요한 힘으로 작용"해 왔다.[32] 하지만 피아노의 아름다운 선율은 좌우 건반이 함께 소리를 낼 때 울려 퍼진다. 동일하게 우리의 현실에서도 좌우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아름다운 선율이 울릴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좌파적 자유주의'와 '우파적 사회주의' 등의 용어가 모순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합리적 보수'와 '책임 있는 진보'가 이념갈등에 앞서 지켜져야 할 기준선으로 정해져야 한다. 버크와 페인이 걸은 길은 달랐지만 동등하게 근대 역사의 원동력이 되었듯이, 좌우의 여러 가치들은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갖더라도 공동체 내에서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진보는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에 분노하며, 이를 바로잡은 올바른 가치를 추구해야하며, 보수는 이미 바로 세워진 가치를 지켜가며 점진적으로 더 나은 사회로 꾸준히 개혁해나가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다. 보수의 '정상화'이다. 20세기 이후 한반도는 맹목적 이데올로기의 전쟁터로 인식되어왔다. 그 인식의 기저에는 반공주의를 외치며 이념적으로 매우 경직된 보수의 이미지가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는 나라가 갈리고 친구가 갈리고 이웃사촌이 갈리는 분단과 동족산장의 비극이라는 역사적 토양에 자리한 것이다. 인민재판, 교차살인, 집단학살과 같은 비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인 폭력과 광기가 지배하던 시대를 직접 목도한 이들에게 참혹한 광경은 내재화되었고, 그들의 이데올로기로 승화되었다. 독재 권력을 감수하면서 경제성장에 목매단 것도, 종교의 기복 신앙적 요소에 의존해 힘들고 지친 삶으로부터 벗어나 한 줄기 위로를 얻고자 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삶의 기반을 지켜줄 수 있는 정치질서와 지도자로 보수를 택하자, 보수는 권력에 취해 비정상의 일로를 걸었다. 보수의 정상화가 시급하다.

보수의 정상화 모델을 먼 곳에 있지 않다. 보수의 길은 버크가 이미 말해주고 있다. 버크는 "변화의 수단을 가지지 않은 국가는 보존의 수단 또한 결여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변화와 보존 수단의 핵심은 인민에 대한 지배층의 온정주의적 책무이다. 영국 보수당의 아버지로 불리는 디즈데일리는 이를 수용해 이념과 정책으로 정립하고, 보수의 제일목표로 인민의 사회복지 확보를 두었다. 그리고 그는 인민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필수적인 조건을 노동조건의 개선이라는 판단 하에 '진보적' 행보도 서슴지 않았다. '보수주의의 항복'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그는 선거법을 개정해 노동자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디즈레일리는 자유당의 30년에 가까운 장기집권 시대를 마감하고, 역시 30년에 가까운 보수당의 장기집권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야당이었던 시절을 포함해 대처의 등장 이전까지 영국 보수당은 바로 그런 이념과 정책을 구사했던 '인민의 정당'이었던 셈이다."[33] 이처럼 대한민국의 보수가 짝퉁 행보를 멈추고 진정한 보수로 거듭난다면, 서민의 공감을 자아내는 뚜렷한 비전과 전략과 정책을 벼려내지 못하고 있는 진보 또한 본 궤도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V. 맺음말

혁명을 배우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이유는 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사건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혁명은 역사적 흐름의 연속선상에서 계속해서 '해방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러한 점에서 프랑스대혁명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원인에서부터 과정과 결과에 대한 해석까지 상이한 혁명이론들과 관점들이 산재해 있다. 프랑스대혁명을 고정된 '닫혀버린' 어제의 기억이 아닌, 활발하게 생동하는 '열려있는' 오늘의 기억으로 만드는 힘이다. 물론, 복합적이며 입체적인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억을 좇는 것이 구름 잡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성과 공동이익이라는 대의 앞에 국가기구가 재구성되고, 주권이 이동되는 일련의 과정으로서 프랑스대혁명은 분명한 문제를 오늘의 우리에게 제기했다. 바로 역사의 변혁을 이끄는 인간의 힘을 얼마만큼 신뢰하는지의 문제다. 헌팅턴의 정의대로 혁명을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바꾸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과, 그런 능력과 더불어 그렇게 할 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신념의 궁극적 표현"[34]이라 한다면, 해석하는 주체인 '나'의 삶 속에서 '혁명의 종'이 갖는 울림의 깊이에 따라 혁명의 손짓, 발짓, 몸짓이 나의 삶과 내가 속한 공동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오늘의 우리는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의 청춘의 트라이앵글 속에서 살아간다. 혁명의 타오르는 열정과 들 끊는 피는 식어 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역사는 만드는 자의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35] 우리가 버크와 페인이라는 두 혁명기의 거장들로부터 역사의 기억을 복원하고 혁명의 유산을 배우는 것은 역사와 교감함으로써 오늘의 '나'의 길을 찾고자 함이다. '혁명의 종은' '나' 자신을 위해 울린다고 했다. 혁명은 입체적이다. 혁명에 대한 정의도, 해석도, 느낌도 다양하다. 혹자는 이미 혁명의 밤하늘은 지나고 찬란한 아침 해가 떠올랐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진정으로 민중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 혁명이라고 정의한다면, 그런 혁명이 성공한 사례는 아직 없다." 어쩌면 우리는 "단지 한 무리의 도둑놈들을 다른 무리의 도둑놈들로 대체한 혁명"의 밤하늘 속에 뭣도 모르고 잠자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36]

페인은 상식이 무너진 현실에 상식을 바로 세우기 위해 혁명가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혁명의 밤하늘 속에서 밝게 빛나는 북극성이 상식의 세계에 떠오를 평화롭고 따스한 아침의 태양으로 인도해 주리라 믿었다. 그에게 있어 상식의 기준은 인권이었다. 우리는 따스한 아침 햇살을 맞이했을까?

[1] 그렇지 않다면, 어찌 자식을 감시하고 고소하는 것도 모자라 자식의 죽음에 거짓 눈물을 흘리는 파괴적 모정과 같은 참혹한 비인간성의 극치가 하늘 아래 당당히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2] 이태숙.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대혁명에 관한 성찰』과 보수주의. 27~29쪽.

우리나라 보수의 치명적인 약점은 친일문제에 있다. 단적으로, 매국에 뿌리를 둔 보수가 지키라 종용할 수 있는 전통의 가치가 무엇이 있겠는가. 한편, 진보 또한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진보인 듯 진보 아닌 진보'의 일로를 걷고 있다. 권력 다툼에 올인(all-in)한 진보는 약자의 아픔과 공명할 수 있는 따뜻한 심장이 없는 허울뿐인 진보이리라. 보수의 무도회에 '진보'라는 가면은, 가식 그 자체다.

[3]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계를 바꾼 아홉 가지 단어』, 동녘, 2010.

[4] 에드먼드 버크, 이태숙 역, 『프랑스대혁명에 관한 성찰』, 한길사, 2008, 171쪽.

[5] 같은 책, 90~91쪽

[6] 같은 책, 94쪽

[7] 같은 책, 85쪽.

[8] 같은 쪽.

[9] 같은 책, 86쪽.

[10] 같은 책, 96쪽.

[11] 토마스 페인, 박홍규 역, 『상식/인권』, 필맥, 2004, 248쪽.

[12] 같은 쪽.

[13] 같은 책, 262, 245쪽.

[14] 같은 책, 263쪽.

[15] 같은 책, 242쪽.

[16] Sato, Sora. "Edmund Burke's Ideas on Historical Change." History of European Ideas 40.5 (2014): 675-692.

[17] 버크, 같은 책, 374쪽.

[18] 강의노트, 15쪽.

[19] 버크, 같은 책, 133쪽.

[20] 같은 책, 142쪽.

[21] 페인, 같은 책, 368쪽.

[22] 같은 책, 370쪽.

[23] 같은 책, 373쪽.

[24] 버크, 같은 책, 122쪽.

[25] 같은 책, 118, 120쪽.

[26] 같은 책, 93쪽.

[27] 페인, 같은 책, 138쪽.

[28] 같은 책, 142쪽.

[29] 김환영, "페인의 펜이 없었다면 워싱턴의 칼은 쓸모없었을 것", 중앙일보, 2010.10.10., web.

[30] 두산백과. "에드먼드 버크",

[31] 페인은 프랑스 국민공회에서 자코뱅 정권으로부터 '팽'당한 후, 미국에 돌아와서도 세기의 '이단자'라는 주홍글씨의 낙인을 받고 모두에게 잊혀졌다. 그의 무신론적 종교관을 드러낸 《이성의 시대》와 불평등한 재산 소유를 비판한 《토지 분배의 정의》가 기득권 세력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32] 강의노트, 23쪽.

[33] 김윤철, "박근혜식 레임덕? 지지층 마음도 못 읽는 대통령", 프레시안, 2014.06.21., web.

[34] 강의노트, 20쪽. S. Huntington, Politicial Order in Changing Societies

[35] 강의노트, 8쪽.

[36] 강의노트,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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