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 or al Fine
오하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소란이 가라앉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런 좋은 무대에 네가 빠질 리가 없는데. 안젤라는 때없는 고요함에 옅은 이질감을 느꼈다. 꿋꿋이 노력한 시험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기분이라도 상한 걸까, 아니면 며칠 전의 '티타임' 탓에 마음이 조금 피곤했던 걸까.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곤, 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되짚으며 안젤라는 주방으로 향했다. 속을 틔워줄 음료와, 기분을 고양시켜줄 요깃거리라도 있으면 될 거라는 지극히 그다운 발상 탓이었다.
평소의 그가 자그마한 풀쪼가리들을 간 것 - 안젤라는 이렇게 생각했다 - 외엔 아무것도 먹지 않던 게 떠올라 주방의 요정들에게 비슷한 것을 부탁했지만, 주문과 달리 그들이 내민 것은 푸르스름하고 작은 열매가 장식처럼 얹어진 타르트였다. 안젤라는 곤란한듯 눈을 가늘게 떴다가, 위에 올라간 장식만 건져 먹는다면 나름대로 괜찮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눅진하게 설탕이 녹아내려 이미 과일의 의의를 잃어버린 요리를 대강 주머니에 챙기고는 다시 그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바깥은 평소의 영국과 다를 바 없이 흐릿했고, 불친절하게도 찌푸린 구름이 금방이라도 빗방울을 짜낼 것 같았다. 이런 날씨에 굳이 밖에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그렇지만 혹시 모르니, 안젤라는 그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으로 향했다.
마주친 오하라의 얼굴에는 하늘보다 더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가 입을 열자 그의 성대에서 빗방울이 쏟아져 나왔다. 폭풍우가 치는 밤에 홀로 우산도 없이 서서 천둥소리를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잘게 몸을 떨며 제게 안긴 그를 가만히 안고서 안젤라는 또다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따뜻하게 젖어드는 셔츠 깃의 촉감을 느끼며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가끔은 짧은 침묵이 기나긴 위로보다 더 알맞은 대답이 되는 것 같다고, 느릿한 리듬으로 그의 등을 두드리며 안젤라는 생각했다.
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안젤라는 제 고른 숨소리와 대조되는 거친 숨을 쉬며 원망과 애정의 말을 내뱉는 오하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누가 널 이렇게 맘놓고 울지도 못하게 만든 걸까.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들었기에 넌 이 순간에도 내게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말하는 걸까. 대체 누가 널 그토록 싫어했던 걸까, 널 외롭게 만들었던 걸까…….
그는 오하라를 딱히 동정하고 싶지 않았다. 딱하다고 느끼기에 그는, 그의 힘으로 쌓아올린 것들이 눈부실 정도로 많았다. 그의 삶은 쉼없이 헤엄치는 백조의 발과 같았다. 자신이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삶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의 욕망은, 안젤라가 더이상의 질문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가 어떠한 악행을 저질렀든, 비겁하기 그지없는 짓을 했던 간에, 안젤라는 조금 실망하긴 해도 결국엔 납득하고 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나 그것과 별개로 그의 대답을 들었을 때, 아무리 방법이 그르다 해도 자신이 가져본 적도 없는 욕심에 대해 쉽게 재단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 그는 오하라를 지나치게 깊게 이해했다.
"그냥 해본 말 아니야. 너라면 괜찮을 거 같아서 그럴 거라고 한 거야.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나 그런 거 못하는 거 알면서."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네게 예외이듯 너도 내게 예외인 걸 넌 알고 있을까. 네 앞에서 난 이상하게 생각이 많아져, 엄청 조심스러워지기도 하고. 내 무던함으로 네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넌 그걸 다정함이라 말하지만, 난 그게 어느정도는 무신경함이라는 걸 알고 있어.
"싫어하지 않을 거야."
단호한 약속의 말을 던지고, 안젤라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작은 조건을 매달았다.
"내가 먼저 너를 싫어할 일은 없을걸."
사실 네가 먼저 나를 미워해도 내가 널 미워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누굴 믿지도 않고, 미워하기만 하는 건 내게 너무 어려운 일이거든. 여전히 제 품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를 힐긋 보았다가, 곧 비가 내릴 것 같은 어두운 하늘로 안젤라는 시선을 옮겼다. 차라리 쏟아지면 좋을텐데. 푹 젖을 정도로 비가 쏟아진다면 오히려 시원할텐데. 지금 당장은 망토 속이 모두 눅눅히 젖고 경기장의 흙바닥도 온통 흙탕물 투성이가 되겠지만, 비가 그치고 그 모든 것들이 흘러가고 나면 실은 그 비가 모든 걸 깨끗하게 쓸고 지나갔다는 걸 알게 될텐데 말야.
"있잖아, 오하라."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여전히 허공을 응시한 채로 안젤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적막한 교정의 밤을 갈랐다.
"안 좋은 기억을 굳이 꺼내게 하고 싶지 않아. 근데,"
"…근데, 나한테 완벽하게 숨기고 있지 않잖아.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나 혼자 오해하고 싶지 않아."
단어가 입 속을 떠나자마자 안젤라의 머릿속에 뒤늦은 깨달음이 스쳤다. 아, 이것도 또다른 나의 무신경함이 아닐까. 너에게 나를 증명하겠다고, 빠져나갈 구멍조차 파주지 않은 게 아닐까. 느릿하다못해 슬슬 멈추기 시작했던 토닥임을 황급히 다시 이어가며, 흐린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안젤라는 덧붙였다.
"…아니면, 아직은 아니야?"
잘 모르겠으면, 조금 더 고민해봐도 돼. 내 손은 늘 내밀어져 있다는 걸 잊지만 않으면 돼. 이렇게 커다란 손이니, 실수로라도 잊기 어렵겠지만. 여전히 제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그를 바라보며, 안젤라는 콧잔등을 살짝 찌푸리듯 웃었다.
"그럼 그냥, 날씨가 나빠서 속상했다고 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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