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록] 그 온화한 눈동자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지성은 미양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연화는 엄밀히 따지자면 세자빈과 친척이었다. 세자빈 신 씨의 증조모가 연화의 증조부와 남매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둘의 아버지, 즉 연화의 고조부는 해주의 고조부와는 형제 사이였으므로, 지성과 연화 역시 먼 친척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명선이 말하기를, 이훈은 신 씨가 아닌 김 씨가 세자빈이 되기를 바랐다. 그의 재종질녀와 신 씨, 그리고 또 다른 가문의 아이가 삼간택에 올랐는데, 세자빈이 된 이는 신 씨였다. 하나, 이훈은 딱히 노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고 했다.
세자빈 자리는 양날의 검이다. 세자를 동궁이라 부르는 게 괜한 일이 아니다. 일국의 국본國本, 한 나라를 책임지는 떠오르는 태양, 그래서 동궁이다. 그런 세자의 빈 역시 막강한 영예를 손에 거머쥐는 건 당연한 일. 하나, 그만큼 부담이 크고 위태로운 게 바로 빈의 무게였다.
당시 이훈은 그런 신 씨를 오히려 지지했다. 자기 재종질녀가 삼간택에서 떨어졌으니 앙심을 품을 법도 한데 세자빈을 비호하는 이훈을 보며 아량이 넓다고 칭송을 해댔다. 하지만 실상 그의 성품을 아는 이들은 절대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 세자빈을 이용하고, 나아가 세가 약한 신 씨 가문을 휘둘러 제가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것. 그것이 이훈과 김 씨 가문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러니 홍 장군과 박 씨 가문을 역모죄로 몰고 간 데에는 어쩌면 세자빈이 관련되어 있을 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지성은 조금 두려워졌다. 이제 와서 김이훈이나 광염회의 세력에 겁을 집어먹은 건 아니었다. 그런 게 무서웠다면 송영이니 뭐니 시작도 하지 않았으리라. 그보다 그가 두려운 건 그들의 사상이었다. 자기들의 신념에 반하고 앞길에 방해가 되는 자들이라면 목숨을 빼앗는 한이 있더라도 없애는 게 세상에 옳다 여기는 그 사상이, 그들의 정正이 두려웠다. 그의 귓가에 아버지가 했던 말이 웅웅 울렸다.
'오히려 네가 경계할 일은 옳음 그 자체를 좇는 일이다. 옳고 바름도 결국 사람의 이해와 판단이 섞일 수 밖에 없으니, 맹목적으로 옳음만을 좇아서는 아니 된다. 이도 저도 어렵거든 네가 당장에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 내 살다 보니 후회만큼 큰 손해가 없더구나.'
지성은 침음했다. 옳음만을 좇는 이들은 어찌 상대해야 좋을까. 어찌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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