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전문)
미완인데 고쳐봤자 더맘에안들듯해서 걍올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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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적인 삶을 즐기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손끝에 맞는 사람이 있다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냥 선을 잡고 살아야 한다.
삶은, 세상은 절망적인 상황이 정상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우울하면서도 느리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한 회전은 때로 끔찍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오르골 같기도 했고 바늘이 떨어져나간 시계 같기도 했다. 하늘이 아무리 푸르다 한들 지상은 불탈 대로 타고 남은 잿빛이었으며 그마저도 겨울이 찾아오며 뚜껑을 덮듯 점점 어두워졌다.
어느 날 느닷없이 긴 죽음에서 깨어난 나는 멸망 이전을 기억하지 못했고 암초를 죽이는 파도처럼, 서로를 맴돌며 끌어당기나 결코 닿지는 못하는 천체의 중력처럼 밀려오는 생각의 공백에 느리게 압사당했다. 그것은 굳이 정정하자면 완료보다는 진행에 가까웠으나 나는 늘 한참 전에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곤 했다. 타인보다 한참 낮은 눈높이는 이미 바닥에 눌어붙은 모양새였고 인파나 낙석에 깔려 죽은 이의 말로 같았다. 그러한 몰락이란 나에게는 지나가는 일상이었으므로 특히나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아닌 이도 있는 모양이었다. 세상에는 늘 예외가 있었으며 내게는 그것이 늘 누군가의 이름 석 자로 다가오곤 했다. 애초에 이 성에 낀 세계, 지평선마저 흐릿해 사방이 모호한 극지에서 시야에 닿는 것이란 얼어붙은 수면과 여전히 대지에 뿌리박은 우박의 잔재, 혹은 그뿐이므로.
그는 나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인 동시에 유일하게 나의 공백에 신경쓰는 사람이었다. 멸망보다 먼저 눈에 담은 것이 그의 존재였으나 그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 나를 부르는 호칭으로 연하라는 것만을 막연히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지나가듯 눈을 맞출 때 그의 눈동자는 나를 이미 떠난 무언가를 좇는 것처럼 보였다. 굳이 그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피하는 그의 눈꼬리를 유성이라도 관찰하듯 바삐 쫓으며 종종 테두리만 남은 생의 인상에 그를 끼워맞추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눈을 맞췄을지도 모르는 그의 얼굴을, 꿈결에 들은 듯한 그의 목소리를. 나는 그러한 파편들이 빈 퍼즐 같은 공백에 욱여넣기에 알맞은 모양인 양 확신하기도 했으나 그저 갑자기 비어 버린 공간이 너무 큰 탓에 찾아오는 착각이었다. 나는 무엇이 맞는 조각인지는커녕 애초에 이것이 조각이 맞는지조차 인지할 수 없었고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네면서도 뭇내 아쉬워했다.
그를 향한 어떠한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은 불어난 망상이 머릿속 한구석에 꼭 맞는 모양으로 틀어박힌 지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에 대한 무언가가 정말로 온전한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일은 한참 전에 접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나는 잊은 기억을 붙잡기보다는 잊지 않을 기억을 만들고 싶어졌다. 그는 기뻐하지도 않았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럼 그러는 게 좋겠다, 하고 내뱉을 뿐.
나는 떠오르는 감정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굳이 드러내지도 않았다. 사랑을 즐기기에 삶은 너무 가혹했고 어색했다. 그는 여전히 다정했다.
절망적인 삶을 즐기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손끝에 맞는 사람이 있다면.
...은 내가 붙잡았고 여태껏 붙잡은 유일한 선(線)인 동시에 선(善)이었으나 손을 맞잡고 손끝을 맞출 만한 이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대 보지 않아도 맞지 않을 손이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장갑을 낀 손이 시야 구석에 침입하면 초점을 맞추기도 전에 그의 손이라는 것을 안다. 손바닥과 손목 사이의 오목한 부분을 맞추면 꼭 한 마디가 남을, 거칠지만 여전히 온기를 간직한 손. 머릿속에서 수십 번을 맞춰 본 손바닥. 그 손금을.
나는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 스스로 마주하지도 못할 손을 거의 습관적으로 잡아채는 대신 장갑 아래에 밀착된 그의 가지런한 손톱을 생각한다. 질긴 천으로 한 겹 감싼 피부 밑으로 흐르는 분홍색 온기. 손바닥을 보이면 손가락 끝에 그믐달처럼 걸려 있을 조각을. 그것들은 홀로 마주하기에는 너무나도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따라서 내가 마주칠 수 있을 만한 종류가 아니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나는 용기를 내는 대신 시선을 돌린다.
그는 자신의 겉옷을 내 어깨에 걸친다.
"형은 늘, 추위를 안 타는 것처럼 행동해."
"저도 사람이에요."
그는 땔감을 꺾듯 마디를 끊어 말한다. 저도 사람이에요. 사랑이에요. 새벽은 춥다. 언 혀는 헛돌고 나는 옷깃을 여민다. 꼬박 하루를 사랑한다고 하루아침에 추위를 느끼는 감각들이 녹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추위를 이겨내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무 적기도 하고 작기도 하므로 나는 추위와는 하등 상관없이 늘 많지는 않은 사랑을 한다.
사랑이에요. 사랑. 사-랑.
혀끝에서 맴도는 실수를 삼킨다. 입을 벌리고 싶으나 세상에는 얼어붙은 혀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다.
절망의 시작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그냥 우리가 원하는 것을 통해 서로 다른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종종 그렇게 생각했다. 시작하고 싶지 않으면 시작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작하고 싶지 않은 것과 시작을 두려워하는 것과 시작으로 하여금 말미암는 결과를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하게 다르다.
"무리하지 마."
체온이 뺨을 데웠다. 누구의 온기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뺨이 붉어졌을지도 모를 터였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 연유가 연정은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그야 그렇다면, 딱 얼어 죽지 않을 만큼의 온기를 만들고야 마는 유일한 순간이 오롯하게 타인을 향할 뿐이라면 그러한 순간들은 너무 비참하지 않나.
"저는 괜찮아요."
목소리가 뚝뚝 끊긴다. 흘깃 시선을 향하면 지평선은 혼탁한 배경에 희끗하게 녹아든다. 살아 있는 것들은 이미 자취를 감췄다.
곧 눈이 내릴 것이다. 아주 지독하게.
나는 다시금 내뱉는다.
"괜찮아요. 정말로."
그는 아무 말이 없다. 나는 굳이 돌아보지 않는다.
한참 후에 돌아보자 그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상실을 채울 유일한 방법이라도 된다는 듯이.
***
눈이 내렸다. 그로부터 딱 두 밤이 지난 후였다.
멸망 후, 텅 빈 기억 속에서 처음 맞이하는 눈은 손바닥 위에서 빠르게 녹아내렸고 얼어붙은 땅을 빠르게 좀먹었으며 돌처럼 단단하게 얼어붙었다. 귓가에 그가 흘리듯 새긴 몇 마디가 지나가듯 12월이라는 사실만을 알렸다. 기억의 공백을 채우는 첫 겨울은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눈가를 어루만지는 냉기가 아릿했다. 세상은 여전히 아득했다.
그해 겨울, 썩 아늑하다고는 할 수 없는 작은 방이 우리의 보금자리였다. 바깥보다야 따뜻할 좁은 방은 어쩌면 나만을 위한 장소였다. 그는 어딘가로 왕래하는 일이 잦았고 때로는 그곳에서 밤을 보내는 듯했으므로. 드물지 않은 빈도로 꼭 홀로 남고 마는 나는 현관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반려동물이나 간병인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중병 환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확신하건대 만나지 못하는 밤이 차라리 나았다. 종종 한 방에서 모서리를 등지고 잠들곤 할 때, 그저 체온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이마를 맞대고 온기를 나누는 순간 추위와는 다른 이유로 뻣뻣하게 굳는 팔을 느낄 때면 가슴 어딘가가 묵직해지곤 했다.
그는 의식적으로 나를 피하는 듯했다.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그는 나를 썩 반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거리를 두려 애쓰는 것이 눈에 훤했다.
그러나 천성이 그의 발걸음을 제 곁으로 끌어당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정이나 연정 같은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도 미지근한 감정으로.
종종 상한 머리끝을 지분거리는 그의 손길은 상처입은 새를 다루는 그것과 별다를 것 없었다. 제 손을 벗어나 날아갈까, 혹은 어딘가 부러질까 쉬이 붙잡지 못하는 손짓에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게 되는 특유의 부재가 있었다. 거세된, 삭제된, 어쩌면 처음부터 그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 내게 부족한 것. 혹은 넘쳐흐르는 것. 아마도 평생을 갈구하게 될 것...
그는 나를 충분히 배려했으나 그것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의 작은 호의는 아마도 친절이라 명명된 동정이었고 나는 이미 치사량에 한참 못 미친 애정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가라앉은 후였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바닥에 등이 넉넉히 닿는 것은 운명이자 숙명일 터이다. 빈 방 구석에 둥글게 웅크려 가만히 유리질의 문턱을 어루만지는 행위만이 그가 없는 일상의 전부였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으나 나갈 필요는 없었다. 호기심에 어깨를 기대고 천천히 얼어죽는 것은 용기라기보다는 만용이었으므로.
그러므로 나는 한없이 기다리고 문은 열리지 않는다. 언뜻 고개를 들면 밋밋한 천장이 뒤집힌 바닥처럼 공기를 내리누른다. 먼지 가루가 눈처럼 떨어지는 천장을 시선으로 더듬으면 시간은 눈꺼풀 아래 끈끈하게 들러붙어 흘러갈 듯 말 듯 한다.
비좁고 어두컴컴하며 싸늘한 우주 같기도 하고 어항 같기도 한, 이 작은 시멘트 상자가 내게 주어진 전부라면 아주 뒤집힌 채 살아가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죽어가는 물고기나 천왕성처럼 처절하고 창백하게 언 공기를 삼켰다 토했다 하고 싶었다. 타원으로 궤도를 그리며 허무로 덧칠된 공백을 둥글게 휘젓고 싶었다. 기억에 없는 그를 사랑하고 싶었다. 사랑하고 있었다. 기왕이면 악착스럽게.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초라하며 서늘하게.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녹아내릴 동정에 붉은 반점 하나를 남기기 위해 나는 갈비뼈 아래에서 겨우 살아남은 애정을 으깨 부수고 있었다.
갑갑한 방 안에서 낡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생각을 곱씹곤 했다.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겠다고. 이 춥고 망망한 잿빛 황야에서는 여느 동화처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음이 분명하므로 이제는 그의 삶이 나를 스쳐갔다는 흔적이라도 남기려 발버둥치겠다고. 그러나 반대로 나의 삶이 그를 스쳐간 흔적이란 너무도 미미하고 초라해서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죽 생각했다. 죽도록 생각했다. 라이터 불을 당기듯 의식이 탁 튄다고 느낄 때쯤 얼핏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눈을 뜨면 그는 여전히 부재중이다. 이틀째였다.
***
"안은 답답할 것 같아서. 형은 예전에 바깥 구경하는 걸 좋아했으니까."
"..."
"형한테 보여주고 싶었어."
한숨을 토하듯 입을 연 그는 어린 새가 지저귀듯 서툰 어조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이렇게 늦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지, 돌아올 때 목격한 이곳의 일출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떠오르는 해를 보며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미약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조급하게 시작한 문장에는 두서가 없었지만 활력이 있었다. 진부하게도 그것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었고 사랑하게 만들 터였다. 마르고 거친 광야와 차갑게 말라붙은 동토에서 봄비를 꿈꾸게 하는 존재가 그였으므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다져 만든 길이 넉넉한 너비로 길고 선명하게 뻗어 있었다. 왔던 길을 몇 번이나 다지며 돌아왔을지 생각했다. 어떤 생각으로 눈을 헤쳤을지 상상했다.
"형, 여기서 내려다보면 내가 매일 다녀가는 곳이 보여."
그는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킨다. 한때 도시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삶을 속삭였을 폐허가 거기에 있다.
"혹시 내가 늦게 돌아오면, 그때 내가 보고 싶으면…."
새벽 공기 위로 흰 숨이 섞인다. 누구의 숨결인지는 알 수 없다.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서늘한 햇빛 위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와서 저길 봐 줄래? 길이 있으니까 혼자서도 올 수 있을 거야. 그러면,"
"그러면 나도, 형이 보고 싶을 때 여기를 볼 수 있잖아. 형이 거기 있다고 생각하면서…."
왱알앵알
그는 내게 이름을 밝힌 적이 없다. 그와 나, 행성이 죽음을 향해 항해하기 시작한 이후로 나에게 주어진 관계는 그뿐이었으므로 나는 누군가를 호칭으로 지정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뱉는 모든 단어는 그를 위한 편지였고 나를 위한 공간에서 그가 하는 이야기는 늘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안다. 그러나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단어도 있다. 짧은 석 자의 이름. 세 음절이 끝나기 직전의 얄팍한 간격.
그가 그 이름을 스스로 입에 담을 때까지 나는 소리내 부르지 못할 것이다. 그가 나와 눈을 맞추며 사라진 과거를 꿈꾸는 한 나는 영원히 그 간격을 넘을 수 없다.
"돌아가자, 형."
그는 손을 뻗었다. 어쩌구저쩌구 노엘이는 대답은못하고 손은잡는다...
***
과거
노엘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싸늘한 공기가 느릿하게 폐를 살랐다. 공기마저 얼어붙는 날씨가 손끝을 잡아 오므렸지만 그것이 제 옷자락을 힘주어 쥘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옷소매를 잡아끄는 손을 애써 밀어냈다. 하얗게 내뱉는 입김이 퍼져 사방으로 달라붙었다. 대기가 몸 밖으로 빠져나온 온기에 득달같이 달려든다. 얼어죽은 이가 숨을 갈구하듯이. 살얼음 깔린 바닥을 핥는 핏물이 눈을 녹이다 핏줄처럼 얼어붙는다. 그의 앞에는 어린아이 티를 갓 벗은 소년이 비석처럼 곧게 서 있다.
"...나도 같이 갈래."
소년은 의외로 끈질겼다. 제가 하는 양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는데도 태연했다. 다들, 적어도 이 자리의 둘만은 죽음에 무뎌져 있었다. 너무 자라 버리면 비 오는 풍경을 보며 별 감상도 없이 우산을 챙겨야겠다,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그야 매일 추락하는 눈송이의 수만큼 사람이 죽어나가긴 했다. 코끝이 얼어 둔해지는 겨울만이 시취를 맡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었으며 그럼에도 종종 목 아래에서는 진득한 혈향이 올라오곤 했다. 죽음이 일상이었고 삶은 곧 생존이었다. 노엘은 작은 손을 차마 뿌리칠까, 고민하다 마지못해 질문하고 만다.
"왜요?"
"갈 곳이 없어."
"저도 없어요."
"그치만..."
소년은 머뭇거렸다. 옷자락은 어느샌가 다시 붙잡은 채였다. 그 흔한 모자 하나 없이 헐벗은 정수리 위로 밤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빨갛게 언 손끝은 부서지기 직전의 도자기 인형 같다. 어쩌면 그보다 더 섬세한.
소년은 입을 연다. 추위에 목소리가 떨린다. 유리잔을 숟가락으로 두드리면 꼭 저런 소리가 났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래도 둘이면 더 나은데."
치기 어린 확신치고는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노엘은 둘이 하나보다 더 나은 이유를 묻는 대신 말없이 장갑을 벗어 차가운 손에 끼워 주었다. 그것뿐이었다.
겨울은 점점 추워졌다. 적어도 12월의 끝자락에는 늘 눈이 내렸다. 바닥에 묻히다 못해 땅 위로 쌓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지나가는 일 년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은 눈과 서리뿐이었고 그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은 보통 희망이라고 불렸다.
새벽이 지나갈 적 이미 덥히는 것을 멈춘 공기에서는 늘 얼어붙은 피 냄새가 났다. 숨을 들이마시든 내쉬든 마른 목구멍에서는 종종 핏물이 올라왔다. 뱉어낸 핏덩이는 촛농처럼 번들거렸고 하얀 기름을 띄우며 천천히 얼어붙었다. 무겁게 쌓인 눈과 얼음을 담요 삼아 덮고 조용히 숨을 죽이는 이들은 모두 부풀린 허파를 뭉개는 동사자이며 단단하게 녹아내리는 고깃덩이였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 아래에서도 서래윤은 늘 퇴고 전의 문장처럼 이야기했다. 익지도 얼지도 않은 날것의 단어는 막 동면에서 깨어나 꿈틀거리는 양서류만큼이나 힘이 있었다. 활력이, 생명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부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노엘은 알고 있었다.
양서류와 달리 그의 피는 꼭 얼어붙기 알맞은 온도였고 봄은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고요한 새벽이 되면 저 멀리서 조심스레 울리던 망치와 정 소리, 검게 언 손끝을 망치로 쪼개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북쪽은 흙마저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으므로 노엘은 서래윤이 노래하듯 내뱉는, 햇빛 냄새를 풍기는 문장들 속에서 바닥부터 얼기 시작하는 불안의 윤곽을 남몰래 더듬곤 했다. 새소리 같은 단어 아래, 손가락으로 쿡 찍으면 배어나올 듯한, 혀뿌리 끝에 틀어박힌 피비린내를. 느리게 숨통을 조이는 핏덩이를. 뭉클한 불안과 체념의, 덩이를.
***
그는 환하게 웃었다.
종종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 있다. 몇백 페이지에 걸쳐 서술되는 순간들. 삶이란 활자나 화소 따위로는 결코 완전히 표현할 수 없는 식의 무한한 연속이기 때문에.
그런 순간이 내게도 있었다. 나는 확신할 수도 있었다. 나의 삶이 백지로 채워진 한 권의 책이라면 이 한 순간을 묘사하기 위해 모든 페이지를 할애하게 되리라고. 나는 이 순간을 위해 평생을 살아왔으며 이 기억을 곱씹기 위해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나는 나의 시작이 된 날, 낡은 폐허의 침대에서 홀로 눈을 뜬 날, 뒤늦게 멸망을 깨달은 날을 생각한다. 그것은 일종의 탄생이었으며 여느 탄생이 그러하듯 모든 것이 기억 한구석에 모호하고 흐릿한 반점으로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날을 곱씹는다. 계속해서 생각하게 된다. 종말을 통보받은 나는 다가오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봄을 노래하는 목소리로 세상이 죽었다고 선언하던 그의 얼굴은 어떤 빛을 띠고 있었는지. '멸망을 통보받았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몇 할의 기억을 담을 공간을 내어줄 수 있을지에 대하여.
짧은 문장은 짧은 기억을 담는다. 그래서 오랫동안 완전하게 안고 가고자 하는 기억들은 최대한 길게 기록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여전히 짐작하지 못한다. 그보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단언하고 싶지 않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을지, 아니면 그를 기억했던 나를 차마 잊을 수 없는 것인지.
나는 물을 수 없고 그는 고백하지 못한다. 그 작은 여백이 상실의, 잃어버린 삶을 스쳐간 누군가의 흔적으로써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아래에는 남기고 싶은 말들이 켜켜이 쌓이기 시작하리라. 동토를 뒤덮는 눈처럼. 미지근한 햇살 아래에서 오지 않을 봄을 기다리며 느릿하게 굳어갈 빗물처럼.
그러므로 나는 오늘을 기억하기 위해 영원히 쓰기 시작할 터였다. 마치 그렇게 하기 위해 여태껏 연명해 온 것마냥, 무너진 존재의 흔적을 애써 끌어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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